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찐따의 기록 보관소/찐따의 생각과 일기

이 찐따는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인 것 같다.

펭찐 2023. 8. 15. 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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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 大いなる相手 ~ 半沢直樹 OST ~

 


 

 

사는 것은 원래 의미가 없다.

그리고 사는 것만큼이나 죽는 것 역시 의미가 없다.

따라서 <니체>를 비롯한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굳이 죽음을 앞당길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왜 살아야 하는 것인가"라는 물음은

어차피 의미가 없기에 고민하는 것조차 의미가 없으므로,

차라리 실존주의적 사고를 통해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찾는다.

 

다만, 그들과는 달리 나는 <찐따>다.

다른 이들처럼 굳이 죽음을 앞당길 필요가 없는 것이 아니라,

나의 경우에는 반대로 굳이 죽음을 앞당겨야 한다.

그것이 공리적으로 올바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이러한 사실을 나 스스로가 잘 알고 있다.

 

나는 <자유>와 <평화>를 최우선 가치로 여긴다.

여기서 과연 진정한 자유와 평화란 무엇일까.

삶이라는 연장선상에 놓여있는 이상,

과연 진정으로 '자유롭다'라고 할 수 있을까.

그리고 중추신경계를 타고 흐르는 생리적인 호르몬 작용을 통해

감각과 감정으로 하여금 고통이 동반되는 이상,

과연 진정으로 '평화롭다'라고 할 수 있을까.

 

고로 진정한 자유와 평화는 자연의 질서와 섭리로부터 해방되는 것,

모든 자연의 법칙으로부터 벗어나는 것,

즉, 다시 말해 자아를 비롯한 나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것이

이 우주 공간에 존재하지 않음으로써 성립된다.

어찌하여 이런 결론이 나올 수 있었는지는

나의 직·간접적인 경험들을 통하여 내릴 수 있었다.

 


 

<죽음>의 정의란 무엇일까.

뇌가 정지한 상태일까.

심장이 정지한 상태일까.

다시 말해 뇌사상태, 그리고 심장마비가 오면

그때 비로소 사망선고를 받는 셈일까.

그렇다면 나는 그것을 직접 경험하였다.

살면서 총 세 번을 경험해 보았다.

다섯 살 때 한번, 스무 살 때 한번, 스물한 살 때 한번.

 

그 세 번의 경험을 통해 나는 알 수 있었다.

'죽으면 아무것도 없구나.'

죽음을 통해 엔트로피가 해방되면서 무(無)에서 오는 평온함.

아무것도 느낄 수 없는 공허의 상태.

그것을 다시 한번만 더 느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지...

굉장히 신비로운 경험이었다.

 

그때의 느낌을 좀 더 자세하게 풀어보자면,

가장 체감이 되는 것은 먼저 시간 개념이 없어진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전혀 체감할 수 없다.

뭐... 의식이 없으니까 당연하겠지만 말이다.

깨어났을 때 분명 나는 몇 분정도밖에 흐르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몇 시간이나 흘러가 있었다.

그리고 의식이 돌아오는 순간의 느낌은...

마치 어둠 속에 있다가 눈부신 빛이 서서히 쏟아지는 기분이 든다.

과장 없이 말 그대로다.

정말로 어두컴컴한 공간에서 광채가 쏟아진다고밖에 표현이 안 된다.

이미 죽음을 경험해 본 나는 불가지론자... 아니 무신론자이지만,

그럼에도 성경에서 <빛이 있으라>라는 구절이 괜히 나왔는지 알 것도 같았다.

그리고 그때의 기분은 정말 황홀하다.

그때 어렴풋이 든 생각은 '황홀경이라는 표현은 이럴 때 쓰는 것이구나'였다.

그 느낌은 정말 너무나도 좋았고, 엄청나게 기분이 좋았다.

왜 그렇게 기분이 좋아지는지 잘 모르겠지만

죽기 전에 엄청난 양의 엔도르핀이 분비되어서 그런 것일까.

 

눈을 떠보니 나는 수술실 앞에 대기하고 있었다.

누군가가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리는데,

소리가 굉장히 뭉개져서 웅얼거리는 것 같이 들린다.

간호사분께서 내 뺨을 계속 때리며 나의 이름을 부르면서 깨우는데

전혀 '아프다'라는 느낌조차 들지 않는다.

그때의 느낌을 빌어보건대 어디까지나 추측이지만

그냥 단순히 뺨을 계속 때려서 고개가 계속 흔들리니까

잠시 활동이 멈춘 뇌가 점차 각성하여 깨어나는 것 같았다.

 

즉, 감각으로부터 해방되어 통증이라는 것을 못 느끼는 상태가 된다.

이 느낌은 아마 자의적이든 강제적이든 '기절놀이'라는 것을 해본 사람이거나

전신마취하고 수술을 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알 것이다.

... 기절놀이를 떠올리니 학창 시절의 PTSD가 오는 것 같다.

중학교 2학년 무렵, 담당일진들이 나를 강제적으로 기절시켰기에

이것만큼은 그다지 좋은 기억은 아니었던 것 같다.

뭐, 그래도 덕분에 기절할 때 느낌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된 엄청난 경험을 해봤으니...

느낌 자체는 죽음의 상태와 그때 그 느낌과 거의 동일하다.

 


 

그래서 나는 진퇴양난에 빠진 것 같다.

죽음이 어떤 것인지 경험해 보았으니 그리운 느낌도 들지만,

현재 과학기술로는 인간은 필멸을 맞이할 존재이므로

죽음이라는 것은 좋든 싫든 간에 어떻게든 필연적으로 찾아온다.

때문에 살아있는 이 순간마저도 모든 것은 한순간이라는 것 또한 알고 있다.

다만, 나는 결론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저 용두사미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문학 소설이 아무리 시작이 거창하고 웅대하고 재미있어도

결국 끝이 안 좋으면 불쏘시개 취급을 받듯이,

인생이라는 드라마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결론은 내가 이 손으로 직접 의지를 가지고 끝맺고 싶다.

 

'의지'라는 것 또한 본연의 의지라고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통제가 가능하느냐 불가능하냐로 놓고 바라본다면

여기서 '의지'라는 것은 스스로 통제가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어떠한 외압 없이 자기 주도적인 결정을 통하여

자기 자신 스스로 사고하고 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사고를 함에 있어 스스로가 결정권을 가지고 있는 상태에서

어떠한 외부적인 개입 없이 주도적으로 실행하는 것을 칭한다.

태어난 것은 이러한 나의 '의지'가 없는 상태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나의 인생을 나 스스로가 비로소 '의지'를 가지고 직접 끝내고 싶다.

 

아직 완결이 나지 않은 수많은 라노벨과 애니가 많다.

아직 해보지 못한 재미있는 게임들도 많다.

그러나 세월은 흐르고 있고, 나이는 먹어간다.

과연 나이 일흔, 여든 먹고 나서도

그때까지도 계속 애니 보고 게임하면서 지낼 것인가.

애당초 내가 과연 그때까지 살아 있을 수나 있을까.

 

나는 드라마 속 주인공이 아니라 엑스트라다.

과거에는 이 사실을 깨닫고 나서 굉장히 슬펐는데,

주제를 파악하고 나서부터는 이 사실이 전혀 슬프지가 않다.

아니, 오히려 좋다고 해야 하나.

엑스트라는 조명받지 않고 조용히 묻혀갈 수 있으니까 말이다.

삼류 악당으로 등장해서 주인공에게 경험치 퍼주는 역할을 해주거나,

전쟁 영화라면 '병사 1'로 등장해 총알받이가 되어서 가장 먼저 전사하는 역할이거나.

뭐, 어찌 되었든 무대에서 가장 먼저 사라질 수 있으니까 그것만큼 좋은 것이 어디 있겠는가.

이 또한 욕심이 없기에 가능한 일인 것 같다.

'어차피 금방 사라질 텐데 굳이 용쓸 필요가 없지. 무의미하니까.'

이렇게 생각할 수 있으므로 편리하다.

 


 

 

사실 '하고 싶은 것'보다도 가장 미련이 남는 부분은...

내가 속해 있는 '문명' 그 자체에 있다.

한낱 연약한 영장류에 불과한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가,

인간이라는 존재가 '연소 반응'이라는 지혜를 깨우치고 나서

순식간에 먹이사슬 최정점에 발돋움했고,

머지않아 아예 자연계를 이해하고 논하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과거부터 현재까지 1%에 불과한 천재들이 문명을 이끌어가고

나머지 99%는 천재들이 이끄는 방향으로 톱니바퀴를 움직인다.

이렇게 문명이 발전하는 대서사시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그 스케일에 압도되어 뒷이야기가 궁금해 미칠 것만 같다.

 

철을 발견한 인간은 도검을 제련하여 맹수를 단숨에 사냥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던 인간은 어느새 9세기에 화약을 발명하였고,

이에 냉병기를 졸업한 인류는 총포를 만들어서 도시 하나를 괴멸시킬 수 있는 무기를 만들어냈다.

18-19세기에 진입한 인류는 초토화 작전 수행능력을 가진 기관총과 탱크라는 무기까지 만들어냈으며,

20세기에는 아예 핵분열을 일으켜 국가를 파괴할 수 있는 흉악한 무기까지 만들어냈다.

그리고 전쟁은 21세기인 현재까지도 계속해서 현재진행형이다.

 

불과 10세기만 하더라도 납으로 황금을 만들 생각하던 인간은

연금술을 화학공학으로 바꾸는 마법을 부리게 되었다.

그리고 20세기에 진입한 인류는 우주선을 개발하여 우주 개척시대를 맞이했고,

21세기가 된 현재, 경제적인 효용성은 매우 부족하지만

기술적으로 다른 물질을 황금으로 충분히 바꿀 수 있는 것은 물론,

이제는 뭐 초전도체니 뭐니 하며 논하고 있다.

이런 압도적인 '문명'이라는 스케일이 나를 궁금하게 만들고 미치게 만든다.

 

<햄릿>에서 나온 구절인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인 것 같다.

죽고자 하니, 생에 호기심이라는 미련이 남아 선뜻 행하기 어렵고,

살고자 하니, 고통이 수반되는 이 시련과 수모를 견딜만한 가치가 있는지

분간하기가 매우 어렵고 의심스러울 지경에 이르렀다.

그래서 말 그대로 진퇴양난이다.

 

문명이 이룩하는 광경을 구경하며

그것을 기록하고 즐거움을 만끽할지,

젊음의 축복이 다하기 전에

그리운 죽음을 하루라도 더 빨리 맞이할 것인지.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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