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찐따의 기록 보관소/찐따의 생각과 일기

찐따의 일기에 대한 주제의 동향을 살펴보았다.

펭찐 2023. 7. 19. 0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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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블로그를 운영한 지 벌써 3년이 조금 넘었다.

그동안 내가 블로그에 작성했던 일기,

그리고 공책에 적었던 일기들을 쭉 읽어보았다.

 

읽다 보니 내가 처한 상황과

그에 대한 나의 짧디 짧은 식견과 견해,

당시 상황에 처한 나의 감정들을 어렴풋이 떠올릴 수 있었다.

 

2014년부터 2019년까지 작성했던 일기들은...

읽으면서 굉장히 처절하게 느껴졌다.

나 자신이 찐따임을 부정하는듯한 처절한 몸부림과

인지부조화를 겪으며 나타나는 고뇌가 느껴졌다.

 

어떻게 하면 사람들에게 다가갈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나 자신이 좀 더 나아질 수 있을까,

그리고... 어떻게 하면 나에 대한 과거를 지울 수 있을까.

그런 이야기들로 빽빽하게 적혀있었다.

내가 처한 상황에 대한 불평과 불만들도 많이 적혀있었지만

'이때는 이렇게 생각했었구나'가 느껴져서 재미있었다.

 

2014년도부터 2016년도의 시기에 적혀있던 주된 주제는

'노력과 재능'에 대한 고찰, 그리고 '천재론'이었다.

'노력과 재능의 경계가 존재할까'라는 의구심으로 시작했고,

'그렇다면 "천재"라고 할 수 있는 기준은 무엇일까'에 대한 궁금증이 들었다.

과연 칸트의 <천재론>을 살펴보아하니,

토머스 에디슨과 아인슈타인이 이야기했었던

'99퍼센트의 노력과 1퍼센트의 재능'에서의 "1퍼센트의 재능"이라는 것의 중요성과

이는 노력 따위로는 넘을 수 없는 벽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에 대해 나 자신은 지금껏 어떤 노력을 해왔으며,

만약 노력을 해야 한다면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 것인지,

그리고 나에게 과연 재능이란 있는 것인지.

그런 고민들과 고찰에 대해 적혀 있었는데,

결국 이 시기에 내렸던 결론을 딱 한 사자성어로 표현해 보자면

<운칠기삼>이라고 표현해 놓았다.

 

운칠기삼.

생애에 "운도 실력이다"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으며 자라온 나였다.

때문에 '운'이라는 요소도 재능에 포함이 되는가에 대한 고찰에서 기인했던 것일까.

2017년도부터 2019년도까지 적혀있던 주제는

'패배주의, 그리고 냉소주의'에 대한 주제였다.

그동안 내가 꿈꿔왔던 이상과 낭만들은 잔혹할 정도로 산산조각이 나버렸고

재능의 한계에 대한 넘을 수 없는 벽이 있다는 것을 체감,

고로 '어차피 무엇을 해도 변하는 건 없다'와

'그럼에도 나는 찐따가 아니다'라는 논리적인 충돌에 의해 발생한 모순으로

끊임없는 인지부조화가 나타나기 시작하였고,

'어쩌면 나는 패배주의자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였던 것 같고,

이내 결국 '아니, 나는 패배주의를 넘어서 냉소주의자가 맞는 것 같다'로 귀결되었다.

 

노력을 해도 찐따의 헛된 몸부림은 광대짓에 불과하다는 것,

그럴수록 나에 대한 타인들의 시선과 몸짓으로 나타나는 행위들로 하여금

더더욱 혐오스러운 눈초리로 변하는 이 냉혹한 현실,

그리고 마침내 체념하여 스스로의 정체성에 대한 정의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시간은 흘러 2020년, 처음으로 이 블로그를 개설하였다.

이미 초창기 때부터 강조해 왔지만 이 블로그를 개설했던 이유는

'나 자신이 찐따라는 사실을 더 이상 부정하지 말고 받아들이는 것'

그리고 '그렇다면 더는 숨지 말고 "나는 찐따다"라고 선언하는 것'이었다.

즉, 2020년에 적었던 나의 일기에 대한 주제는

'"나"는 과연 어떤 존재인가' 였던 것 같다.

 

이내 내가 찐따라는 사실을 서서히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말 그대로 운명의 장난이었을까.

참으로 아이러니하게도 <찐따>라는 키워드가 갑자기 이슈화가 되며

온갖 커뮤니티가 불타올랐고, 유튜브에 온갖 영상도 올라왔다.

이러한 이슈에 편승하여 또 다른 논란 아닌 논란거리가 발생하였는데,

"인싸 새끼들이 찐따 코스프레를 하며 기만질을 하기 시작했다."라는 것이었다.

찐따의 기준이 점점 이상하게 변질되어가고 있는 이 괴이한 현상.

이에 나는 '그렇다면 저들이 찐따고, 내가 찐따가 아니라면...

그럼 나는 도대체 무엇인 것인가'라는 혼란이 생겼다.

'나'라는 정체성의 불투명함이 나를 괴롭혔다.

때문에 나는 사람들이 오인을 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고,

'찐따'라는 미천하고 천박한 존재가 미화되는 행태와 잘못된 오해를 바로 잡고자

"찐따", 즉 '나'에 대한 특징들을 적어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런 과정에서 뜻하지 못했던 인연이 생겼다.

 

2020년 후반 무렵과 2021년에 적혀있던 내용은

한 소녀에 대한 이야기들로 적혀있었다.

다시 말해, 2021년에 적혀있던 일기의 주제는 '친구'라고 할 수 있겠다.

우연에 우연이 겹쳐서 맺어진 기적과도 같은 인연이었다.

27년이라는 긴 세월이 지나고 나서야 처음으로 사귀어본 <친구>라는 존재,

비록 짧은 시간이긴 했어도 그 친구가 나에게 선물해 준 소중한 경험들.

여태껏 해본 적 없던 친구와 함께하는 생일파티라는 것도 해봤다.

일기를 보다 보면 이 시기만큼은 세상이 달리 보였던 것 같았다.

'불신으로 가득 찬 이 세상에도 이토록 친절한 사람이 존재했다.'

이것이 일기 첫 부분에 적혀있던 문장이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행운이 찾아오면 그에 상응하는 불행도 찾아오기 마련이다.

나는 이 시기에 수술했던 지병이 재발하여 다시금 고통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나는 처음으로 사귄 '친구'의 존재로 고통을 이겨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였다.

"하지만 이내 그토록 친절했던 소녀도 이 찐따는 감당하기 어려운 존재였나 보다."

이것이 마지막으로 적혀있는 문장이다.

 

2022년, 나는 다시 혼자가 되었다.

고독함이 몰려왔다.

인터넷도 하지 않았다.

오로지 하는 일이라고는 방구석에서 애니를 보며 시간을 축낼 뿐이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있던 와중에...

옛날에 나의 담당 일진들을 우연히 마주치게 되었다.

그리고 깨닫기 시작했다는 내용으로 시작한다.

 

이때 내가 하고 싶었던 것을 하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부터 늘 호기심을 갖고 있던 '프로그래밍'이라는 분야.

그것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역시도 우연에 우연이 겹쳤다.

그래, 2022년 일기의 주제는 바로 '사회'다.

 

28살이 되고 나서야 비로소 사회라는 곳에 발을 딛기 시작하였다.

두려움과 불신, 혐오로 가득 차있는 이 '사회'라는 무대.

하지만 처음 입사하게 된 회사의 사람들은 굉장히 친절했다.

근무 환경도 굉장히 좋은 편에 속했었다.

그러나 나는 매우 서툴고 어눌하고 어색했다.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상황이 매우 급속하게 변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일기를 한 페이지씩 넘길 때마다 매번 상황이 새로웠다.

사회라는 것을 경험해 본 적 없는 나에게는 힘든 고비였다.

그리고 연말에 더욱 큰 시련이 다가왔으니,

사회생활의 끝판이라고 할 수 있는...

난생처음으로 '소개팅'이라는 것을 하게 되었다.

뭐... 당연하겠지만 나는 "찐따"였기에 결국 까여버렸지만 말이다.

 

2023년이 되었다.

다니고 있던 회사의 근무 조건, 환경,

심지어 회사 사람들조차 매우 좋았지만

이조차 버티지 못하고 나는 계속 추락해가고 있었다.

이윽고 멘털이 나가버린 나는...

결국 사퇴를 하고 말았다.

그렇게 또다시 시작된 폐인 생활.

또다시 홀로 고독한 싸움을 이겨나가며 간신히 버티고 있다.

"찐따 같던 자식 놈이 이제야 사회생활이라는 것을 하는 것 같더라니,

이 나이 처먹고도 정신 못 차리면서 나약하게 뻗어있네."

나는 다시 가족들의 눈치를 받게 되었다.

그렇게 2023년 올해 일기의 주제는 '자연'

그리고 '가족'이 되었다.

 

태어나서 지금껏 눈치만 보고 살아왔다.

그런 인생이다.

정신이 온전하지 못하게 되었고,

이는 곧 '신체화'가 진행되어 육신까지 망가지고 있었다.

때문에 나는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어쩌면 나는 태생부터 누군가와 지내면 안 됐던 것이 아닐까?

본디 사람은 사회(정치)적 동물이라고 하지만...

나를 돌아보면, 나는 과연 사회적인 사람인가?'

이러한 의문점이 맴돌았다.

 

이 도시를 떠나, 속세를 떠나 홀로 조용히 지내는 것.

자연으로 돌아가 조용하게 여생을 보내고

때가 되면 소멸하는 것.

그것이 "찐따"가 할 수 있는 최고의 마침표가 아닐까.

나는 자연으로 돌아가기를 다짐하기 시작했고,

이것저것 알아보면서 어떻게 하면 좋을지 궁리하고 있었다.

 

그러나 가족들은 이러한 나를 전혀 곱게 바라보지 않았다.

'저 새끼 저거 또 회피만 하고 도망칠 궁리나 하며 개수작하고 있구나.'

그렇게 생각하시는 것이 느껴졌다.

아버지는 하시는 말마다 족족 맞는 말만 하셨다.

말 그대로 '팩트폭행'...이라고 하던가.

아무튼 자연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나의 소망과

그것을 바라지 않는 나의 가족들과의 의견에 마찰이 생기고,

결국 여러 잡음이 만들어지고, 이내 불협화음이 생기면서

일기에도 가족에 대한 이야기가 계속 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최근 할머니께서 위독하시다는 안 좋은 소식도 듣게 되었으니 말이다.

대동맥이 파열되어 약 3분 동안 심정지가 오셨고,

응급처치를 해서 다행히 큰 위기를 벗어나셨다고 전해 들었다.

다만 수술을 하기 어려운 상황이라 약물 치료로 버티고 계신다.

때문에 아버지께서 많이 힘드신 상황이다.

마치 감정에 격세지감을 느끼시는 것 같다.

그러한 감정의 파도 한가운데에 찐따인 나 역시도 분명 존재할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아버지께 연락을 드리려다가...

'내가 무언가를 해봤자... 화만 돋우시겠지...

찐따새끼의 쓸데없는 위로가 무슨 소용이야.

그냥... 닥치고 조용히 있는 것이 도와드리는 유일한 길이겠지.'

나는 들어 올렸던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찐따란 하등 도움 안 되는 존재이기에,

나는 침묵을 택한 것이다.

'친애하는 가족 대신 내가 대신 죽는 것이 마땅한 일일 텐데.'

이것이 일기의 마지막 문장이다.

 

과연 나는 계속 살아있을까.

이번 한 해가 지나면, 나는 어느덧 서른이 될 것이다.

서른이 되어서도 나는 찐따일 것이고,

늘 그래왔듯 찐따 같은 내용으로 일기를 채워 넣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존재해도 되는 것일까.

그동안 적어왔던 일기를 보면서 생각이 깊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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