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찐따, 미래에 대하여 -1-

펭찐 2022. 2. 22. 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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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열심히 적었던 일기장을 꺼내어 그 당시의 나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분석해보았다.

그러고 나서 블로그에 적었던 글들도 쭉 한 번씩 읽어보았다.

내 나름대로 나의 글들을 분석해본 결과, 나의 글들의 공통점을 알 수 있었다.

나의 글에서 자주 언급되는 단어는 '과거'와 '생각'이었다.

'생각'이라는 단어는 내가 작성한 글들의 맥락상 자연스럽게 들어갈 수밖에 없는 단어라서 스스로 납득이 되었다.

왜냐하면 나의 글들은 온전히 나의 생각들을 적었던 것들이고, 대두되는 시사점들은 도덕 추론상 사실 판단의 문제가 아닌 가치 판단의 문제였기 때문이다.

남들에게 설파할 목적이거나 설득하기 위한 목적의 글이 아니었기에 '~라고 생각했다', '~라고 생각하게 되었다.'라고 적는 것이 오히려 맞는 것 같다.

고로 '생각'이라는 단어가 많이 들어가는 것은 이상할 것이 없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내가 문제라고 생각했던 부분은 지나치게 '과거'를 언급하는 것 같아 보였다.

과거를 언급하는 것 까지는 좋다. 그럴 수 있다고 본다.

그만큼 나는 과거에 대한 후회와 억울함, 그리고 미련이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하는데 시간을 투자하였다.' 내지는 '~해서 ~해야겠다.'와 같은 '미래'를 암시하거나 '미래'를 위해 생각하는 말미로 끝나는 문장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이것이 내가 가진 문제점이 아닐까 스스로 고민해보았다.

 


 

'나는 왜 과거에 그토록 집착하게 되었는가.'

이것의 원인을 분석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해보기로 했다.

너무나도 쉽게 당장 떠오르는 원인은 내가 '찐따'여서, 과거의 내가 너무 못나서.

'찐따'. 나의 과거에 대한 모든 것들이 이 '찐따'라는 대명사 같은 비속어 하나로 설명이 가능하다는 것이 참으로 아이러니하면서도 핑곗거리 수단으로써 편리하다고 느낀다.

내가 글을 쓴 당시 기준으로 '현재'의 나와 '과거'의 나의 차이점이 거의 없다시피 하기 때문에 그에 대한 혐오감이 생겨서가 아닐까.

가장 큰 차이점이라면 '나이', 달리 말하자면 '시간'이라고 볼 수 있겠다.

누구나 자신이 왕년에 얼마나 잘 나갔으며 좋고 나쁨을 떠나서 자신이 어떤 추억을 가지고 있었는지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쉽다.

다만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을 실천하고 현실로 실현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시간은 한정되어 있고, 나이를 먹으면서 나에게 남아있는 것이라고는 앞으로의 '미래'보다는 '과거'가 돋보이게 된다.

앞으로의 미래가 더 나아질 것이라는 보장과 확신이 서지 않으니 과거에 얽매일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든다.

 

내가 과거에 집착하게 된 원인은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나는 왜 미래가 더 나아질 것이라는 보장이 없다고 단정 짓게 되었는지 다시금 고민해보았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내가 같은 나이대의 동기들 보다도 이룬 것이 전혀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이 든다.

학력도 받쳐주지 못하고 연애를 해본 경험도 없으며 친구를 사귄 경험도 그때 그 소녀가 전부였으니 말이다.

즉, '경험'의 차이가 남들보다 압도적으로 벌어져 이것의 격차를 다시금 따라잡는 것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워졌다.

여기서 나는 알 수 있었다.

격차가 너무 크면 그때부터 좌절하고 포기하게 되는 것이라는 걸 진심으로 깨달았다.

 

그렇다면 이 격차의 기준점은 어떻게 설계되었고, 무슨 기준으로 잡게 되었는지 그것에 대해서도 한번 고민해보았다.

따지고 들면 이것은 누가 정해준 것도 아니다.

모든 이들의 생각에 대한 합의점, 암묵적 타협과 그 타협의 교집합, 집단 지성의 보편화.

달리 말해 '사회적 통념'이 만들어낸 것이다.

애초에 수능이라는 시험 제도가 왜 있겠는가. 통념이 있기에 만들어진 것이다.

통념이 기준을 만들고, 그것에 적합한 인물을 선별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사회적 통념이 없다면 선별 기준이 없기에 시험을 볼 필요가 없다.

사회적 통념이 없다면 도덕적 기준도 모호해지기에 예법이 쓸모없고, 그렇기에 남 눈치도 아예 볼 필요도 없다.

사회적 통념이 없다면 법도, 질서도, 약속도, 인간과 인간 사이에 벌어지는 모든 거래들이 무의미해진다.

'통념'. 이 하나가 모든 것의 기준점을 결정짓는다.

당장 '선 넘는다'는 말속에는 '눈치 챙겨라'가 있고, '눈치 챙겨라'는 말은 '사회적 통념을 지켜라'가 되겠다.

나는 이 '통념'에서 벗어나 사는 인물이 아니다. 이곳에 섞여 사는 수많은 군중들 중 한 명일 뿐이다.

이것을 통해 결론을 지어보자면, 통념을 따르는 이상 누구든지 천운이 따르지 않는 한 압도적인 격차를 벗어날 수 없음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나는 마냥 천운에 기대어 살아가야만 하는가, 그럴 수밖에 없는 운명인 것인가에 대해서도 한번 생각해보았다.

남들에 비해 경험이 압도적으로 적고, 이미 지나간 시간은 돌이킬 수 없기에 숙명이라면 숙명일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포기하는 길밖에 없을지도 모르겠다.

'포기'에 대한 고찰은 아직 글을 쓰는 중이고 정리가 덜되었지만, 개인적으로 포기하는 것이 꼭 나쁘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포기해버리면 편하다는 말은 압도적인 격차를 겸허히 받아들였기에 몸과 마음은 편하다는 말로 들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자신의 처지에 대해 순순히 인정하고 받아들인다면 꼭 포기하는 것이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포기해버린다면 '미래'에 대해 논할 가치가 없어진다.

나는 생각하는 것이 즐겁다. 생각하기 때문에 존재하는 생물이다.

끝없이 생각하고 거기서 얻는 즐거움이 단 하나라도 있다면 인생이 무의미해도 상관없다.

내 삶의 모든 것이 무의미해도 상관없다고 여기는 경지까지 왔다.

여기까지 도달하는데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렸으며, 얼마나 힘이 들었는지 모르겠다.

남들이 보면 비웃을지도 모르겠지만 나에게는 굉장히 험난한 여정이었고, 간신히 여기까지 왔다.

그래서 포기하면 쉬워지는 길을 택하지 않고 스스로가 사서 고생하고 있다.

그렇기에 고민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숙명은 숙명이고, 통념은 통념대로 받아들이되, 나 스스로가 별다른 기준점을 만들어낸다면 어떨까.

나 스스로가 납득할만한 가치를 만들어서 창출한다면 그걸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 미래에 대하여 ~ 1편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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