펭찐이의 블로그

안녕하세요오오...

펭찐이의 블로그 자세히보기

찐따의 기록 보관소/찐따 아카이브

찐따가 하는 과몰입

펭찐 2020. 10. 24. 16:06
반응형

 

 

 

 

'세상은 네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진리는 단순하고 간결하며 때로는 잔소리로 여겨질 정도로 당연한 것.

승자 없는 싸움, 무엇을 위해 싸워야 하고 왜 싸워야 하는지 모를 이 세상에 던져진 것에 대해

이유를 알아가려고 하는 것은 오히려 스스로 더 이상하고 괴팍한 모습으로 비치는 것 역시

이해할 수 없는 시선과 무지가 만들어낸 단편적 논리들의 연장선.

 

현실과 이상과의 괴리감을 느끼는 나 자신이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픽션을 선호한다.

애니, 소설, 드라마, 영화 등 제삼자의 시선으로 사건의 전개를 뒤에서 '방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창작물은 나와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

주인공이 어떤 시련을 겪었고, 어떤 사건을 겪게 되는지 말 그대로 나와는 전혀 상관이 없기 때문에

이에 대해 불평불만을 가지거나 만족감을 느낄 필요조차 없어 부담감이 없다고 느끼는 그것이다.

실제로 일어난 일도 아니 거와, 그래서 쓸데없이 감정이입을 하며 감정 소모를 할 필요가 없으리라 여긴다.

소설 속 주체가 어떤 최후를 맞이하든, 소설의 결말이 해피엔딩이든 아니든 그것은 나와 전혀 관계가 없는 일.

상황에 따라서는 물리법칙도 마음대로 어기며 무시하는, 말 그대로 실제 하지 않는 '허구'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여차하면 그러려니 하고 가볍게 넘어가는 것이 가능하다.

이렇기에 사실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소설은 가급적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소설 속 주체가 온전한 나 자신이 아니라는 것은 마찬가지이므로

이 역시 스스로에게 크게 집착이 되거나 신경이 쓰이는 부분은 아니라고 단정 지어본다.

 

그래서 팩트 기반인 삼국지 정사보다는 연의를 좋아한다.

어떻게 보면 지독한 현실 부정이라는 생각도 들지만, 그것이 꼭 나쁘다고만 생각이 들진 않는다.

나관중의 필력을 통해 각색을 거쳐 완성된 역사 기반 허구의 소설.

때문에 누군가는 역사 왜곡이라고도 부르기도 하지만 나에게는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기에

나에게 이야기라는 것은 짧게 혹은 길게 생각할 수 있도록 소비할 수 있는 목적 수단으로써 존재하면 그만이다.

홍몽의 상태와 다를 바 없는 난세라는 배경 속에 각 인물들이 살아남기 위해 어떤 생존력을 발휘하는지

나와는 전혀 관계없는, 그래서 나는 그저 방관하고 구경할 수 있기에

친구가 없어 의지할 곳이 도서관밖에 없던 나의 학창 시절을 책임지던 베스트셀러였다.

그리고 등장하는 인물들에 자신을 투영하며 자신의 삶과 비교하면서 생각해보려는 시도는,

스스로에게 잔혹하다는 마음이 들어 썩 내키지 않을 터.

그리하여 문뜩 이런 생각이 들었다.

육체를 비추기 위해 사용하는 것이 거울이라 여기고

생각을 비추기 위해 사용하는 것이 문화라고 여겨지기에

결국 두 가지 모두 투시하려면 해부 과정이 필요하기 마련.

이렇듯 일차원 적인 사고에 지나지 않는 단순 무식한 생각을 해본다.

비록 해부하는 과정이 전문적이고 섬세한 손길로 부검을 집도하는 검시관이 아닌

나의 수준은 도륙내고 패대기를 치는 도살자...에 불과하지만 말이다.

 

때가 되면 녹음 지고 때가 되면 빙설이 앉게 되는 계절을 여기는 것과 같은,

어쩌면 너무나도 당연한 이미 결정된 전개와 사건들.

아무리 생각해봐도 현실 속 자신을 굳이 허구 속 인물에 투영할 가치는 여전히 없지 않은가.

결국 결말은 이미 정해져 있고, 허구 속 세상에 관심을 두는 것과 허상의 존재에 자신을 빗대는 것은

너무나 무의미한 행위라고 생각이 들고, 이에 대해서는 확실한 정리가 되었다.

하지만 이 현실에 실체 하는 존재에 관해서는?

 

네 인생 남이 대신 살아줄 수 없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나는 나고 너는 너다, 너나 잘해라 이런 말도 있지 않은가.

모든 사람이 전부 남에게 관심을 가지지는 않지만 관심을 가지는 사람도 분명 있기 마련이다.

사람은 사회(정치)적 동물이라고 이야기하기에 거기서 비롯된 행위가 아닐까 생각도 들었지만

긍정의 의미로서 배려와 공감에서 비롯된 행위와는 조금 다른 그것이 있지 않은가.

단적인 예로 연예계라는 콘텐츠에 소비하며 연예인에게 자기 자신을 투영하거나

그 사람에게 심리적으로 정의하며 과몰입해서 보는 경우가 그러한 경우이다.

남의 인생에 관심을 가지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궁금하다.

 

존경, 경외, 충성심, 질투, 열등, 분노, 박탈감 등.

타인이 나 자신보다 우월한 존재라고 느끼게 되어서?

상대적으로 연예인 같은 경우 자신보다 더 우월한 존재라고 여겨지기에 과몰입이 되는 것인가.

이렇게 따지고 들면 결국 허구 속 존재에게 과몰입하며 왈가불가하는 것과 차이가 없는 것 아닌가.

어차피 나와는 상관없는 사람이고, 어차피 나의 인생에 도움이 되지 않은 인물이며,

어차피 나라는 존재조차 의식할 수 없는 또 다른 존재에 불과하며

과몰입을 한다고 해서 내가 그 사람이 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타인이 다른 어떤 사람과 연애를 하든, 결혼을 했든, 이혼을 했든,

돈을 잘 벌든, 좋은 집과 좋은 차를 가졌든, 누구와 싸웠든 싸우지 않았든

나 자신과 직접적인 관계나 접점이 단 하나도 없으므로 내 인생에 아무런 상관도 없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은 스스로가 아주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자기 자신을 투영하며 과몰입하고 그 사람에 대해 평가하고 논하게 된다.

이는 누구를 위한 평가이며, 누구를 위한 논쟁인가.

 

그렇다면 과연 자신이 등장하지도 않는 포르노는 굳이 왜 몰입해서 보는 것일까.

결국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다.

자신이 직접 포르노 배우가 되는 것도 아니면서도 포르노에 몰입한다.

이를테면 대리만족과 스스로에게 보상을 받고자 하는 심리.

그러한 욕구가 충족이 되면 허탈함과 허무함이 사고를 지배하고,

욕구가 쌓이면 다시 해소시키려고 하는 본능에 의해 같은 행위를 끝없이 반복한다.

그렇다면 타인에게 몰입하게 되는 것 역시 포르노와 똑같다고 한다면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함인 것인가.

그 욕구라는 것도 '본능'이라고 할 만큼 강력한 것인가.

그렇다면 그 본능이란 것은 어떤 본능을 뜻하는 것이며 어떻게 정의를 내릴 수 있는가.

정말로 단순하게 대리만족과 보상심리 이 두 가지가 본능이라고 치부할 만큼 맞긴 한 건가.

 

인생은 무의미하다.

무의미 하기에 재미가 없고 지루하다.

이런 이유로 재미가 없기 때문에 스스로 재미를 찾게 되고, 그것이 타인에게 과몰입을 하는 것인가.

하지만 인생은 무의미하고 재미가 없는 것이라면 타인에게 과몰입을 하는 행위 또한 마찬가지가 아닌가.

재능의 차이만 존재할 뿐, 결국 나와 다를 바 없는 똑같은 자연의 시스템에 결속된 존재라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말 그대로 놀음과 유흥거리, 오락 취급으로 감정의 선을 넘나들며 소비하게 된다면,

재미에 대해 본능이고 나발이고 그 무엇도 논할 가치가 없어진다.

 

이것이야 말로 찐따가 고의적으로 범하게 되는 과몰입.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