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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것은 원래 의미가 없다

펭찐 2020. 4. 14. 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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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나같이 대가리 텅텅 비어있고 공부도 못하고

무엇 하나 제대로 잘 알지도 못하는 찐따 새끼가

철학을 논한다는 것 자체가 넌센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긴 개소리를 작성하고자 한다.

비록 여기에 쓰이는 활자와 트래픽이 아까울지라도.

 

나는 친구 없는 찐따라서 늘 혼자 질문하고 혼자 답변하기에,

잠들기 전에 항상 하는 생각이 있다.

'그래서 나는 왜 여기에 있는 걸까.'

왜 여기에 있는 것일까.

왜 존재하는 것일까.

이런 생각이 드는 것 자체가 내가 찐따라서 그런 것일까.

이것이 그토록 궁금했다.

 

얄팍한 추론과 종교의 주객전도

수많은 인터넷 사이트를 둘러보고 위키와 논문 등을 찾아보았다.

'인간의 존재 이유'는 아직 과학적으로도 명확하게 증명되지 않은 바이기에

흔히 인터넷에서 일어나는 이 논쟁은 어느덧 종교적인 측면으로 주객이 전도되고 있었다.

계몽주의가 유행한 이후에는 이들에 대한 인식은 좋지 않은 편이며,

비교적 설득력이 많이 떨어진 상태이다.

신(神)의 존재를 믿는 부류들은 이전과 달리 적다는 말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다음과 같다.

'사후세계가 존재하기 때문에 신이 창조한 율법을 따르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

신이 우리를 만든 이유는 ~때문이므로 천국에 가기 위해서

신앙심과 믿음을 가지며 살아야 한다'라는 레퍼토리로 흐른다.

불교의 경우 종파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윤회' 역시 '카르마'의 존재를 강조함으로써 끝맺음하는 경우가 많았다.

뭐, 이 역시 잘 생각해본다면 사람이 죽은 후 온 우주로 흩어진 원자들을 다시 재결합시킨다면

이들이 이야기했던 '윤회'가 된 것이라고도 볼 수는 있겠지만

무슨 SF 소설 쓰는 것도 아니고 그저 터무니없고 뜬구름 잡는 이야기에 불과하다.

애초에 '카르마'라는 시스템도 옳고 그름을 정의 및 규정하는 주체 역시 '인간'이라는 점에서 이미 모순.

 

가뜩이나 나의 나쁜 대가리를 안쓰럽고 처절하게 굴려본 결과는

당연하게도, 그들 역시 '사람'인지라 답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사람이 사람에게 '인간은 왜 존재하는 것인가?'를 물어봤자 알 턱이 있을까.

애초에 접근 방식이 '사람'에게서 찾는다는 것 자체가 잘못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신의 이름'을 빌려 애써 철학을 논파하려는 작자들 역시도 그저 인간에 불과한 존재들이다.

 

그리고 이들은 이상하리만큼 사후세계에 대해 언급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나는 사후세계에 회의적이다.

나는 그 어떤 종교도 믿지 않는다.

왜냐하면 나는 인간이 죽은 뒤에 어떻게 될지 알고 있다.

호흡정지와 뇌사상태. 즉, 나는 이전에 '죽은 상태'가 되어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전신마취도 해본 경험이 있는데, 그것과 동일하다.

전신 마취해본 사람들은 알 것이라고 생각한다. 과장 없이 정말 그 느낌 그대로다.

그냥 "억!"하고 한 순간에 정신을 잃는다.

그래서 나는 사후세계가 존재하지 않다는 것을 확신한다.

그 죽음의 상태는 말로 표현할 수 없다.

나의 존재 자체를 자각할 수 없는 상태.

'내가 죽었구나'라는 생각 자체도 할 수 없는, 아무것도 없는,

말 그대로 '無'의 상태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때 내가 죽은 상태였는지조차 몰랐다.

그냥 순간적으로 정신을 잃었다. 그게 전부다.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며 다시 생각한다.

나는 죽으면 말 그대로 아무것도 없는 상태가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다면 사는 것 자체가 의미가 없지 않은가?

어차피 죽으면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는다는 것을 직접 경험해봤고, 그것을 잘 알고 있다.

 

존재의 의미는 곧 삶의 의미라는 것을 의미하고

삶은 내가 살아있을 때, 즉 존재할 때 효력 있는 논리이니까

죽으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데, 후에 존재하지 않는 상태가 되는 뻔한 결말 앞에서

이러한 단편적인 논리들의 연장선상이 과연 무엇이 의미가 있는지 너무나 궁금하다.

 

사피엔스의 한계

 

꺼무위키에서 죽음의 개념은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여기에 대해 추가적으로 하나 더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아직까지 무기질로 생명을 연장하는 생명체는 발견되지 않았고

그것이 가능하도록 하는 과학 기술은 발달이 되려면 한참 멀었다.

즉, 인간은 유기물을 섭취해야만 하고 영양 공급이 되지 않으면 삶은 종료된다.

영양을 공급해야 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결국 세포 활성화이다.

신체를 이루고 있는 세포들을 활성화를 시켜야만 삶을 영위해나갈 수 있다.

생물학적으로 바라본다면 인간은 세포를 활성화시키기 위해 존재한다.

 

결국 '인간은 왜 신체를 이루고 있는 세포를 활성화시켜야 하는가'라는 순환논리에 또다시 빠져든다.

이에 대한 해결책은 과학 기술력이 미치지 못하므로 아직까지는 철학적으로 논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내 주관적인 의견은 '삶을 미친 듯이 영위해서 그 답을 찾아내기 위해'라는

뻔한 답변 외에는 내릴 수 없었다.

 

답을 찾아내려면 결국 시간문제다.

계속 수명을 연장시켜서 답을 찾아낼 때까지 존버 하는 거다.

근데 역설적으로 그 해답을 찾아낼 수 있는 과학 기술력을 보유한 문명이라면

카르다쇼프 척도에 의하면 '시간'이라는 개념조차 초월한 문명일 것이다.

종의 기원에 대해 설명 가능하고 자신의 존재 이유를 알고 있으며 깨달음을 얻은 존재.

이를테면 그것이 곧 '신'이라고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닌가.

아니 애초에 신이라는 존재가 되면 존재 이유를 알아낼 이유 자체가 무색해질 수도 있겠다.

 

알면 알수록 사피엔스종 생명체가 수명이 짧다는 것에 대한 회의감이 느껴진다.

 

결정론, 운명

양자역학의 '라플라스의 악마'라는 이론이 있다.

원자의 위치와 운동량을 정확하게 계산할 수 있다면 가까운 미래까지 예견할 수 있다는

기계론적 결정론에 의거한 양자 이론이다.

뭐, 후에 라플라스의 악마 이론은 불확정성 원리에 의해 개소리라는 것이 증명되었지만 말이다.

 

라플라스의 악마가 등장한 이후 대부분 근현대 과학은 모든 것은 결정되어 있다는 결정론을 따랐으며

시간이 지나 코펜하겐 해석에 의해 확률론적 결정론이라는 것도 탄생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 시기부터 자유의지론을 부정하는 사람들이 많았기에 결정(및 운명)론을 믿었던 과학자들도 꽤나 있는 듯하다.

꺼무위키에 의하면, 모든 사건에는 과학적 원인이 존재하며,

이를테면 "나는 짜장면을 먹을지, 아니면 짬뽕을 먹을지 선택할 자유가 있다"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둘 중 어느 것을 선택할지는 여러 과학적 원인들로 인해 결정이 된다고 해석했다.

이를테면 타고난 입맛, 중국집에 대한 평가, 방금 전에 먹은 음식 등 여러 욕구 및 기억들에 의거하여 결정된 것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물론 스스로의 자유의지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무작위로 만난 사람을 살해한다고 그것이 자유의지를 입증해주지는 못하지만.

 

만약 인과관계가 정말로 다 정해져 있고 모든 것이 전부 필연이라면 존재 이유 또한

알 수 없는 그 필연적 무언가에 의한 의미로서 둘 수 있겠지만

다시 역설적으로 생각해본다면 어차피 모든 것은 결정이 되어 있으니

'자아'라는 것 역시 그저 이미 결정된 대본 위에 움직이는 꼭두각시 인형에 불과하여

결국 무의미하다고도 생각할 수도 있다.

통 속의 뇌와 일맥상통하다고도 볼 수 있겠다.

 

원래 의미가 없다

적어도 내가 죽기 전까지는 세포단위로 컨트롤할 수 있는 나노기술력이 발달하진 못할 것이고

생명을 지속적으로 영위할 수 있는 과학 기술력이 발달한 것도 아니기에

결국 언젠가는 죽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찐따 새끼라도, 잘난 놈이어도, 금수저여도, 흙수저여도

결국 아무 의미도 없다.

어차피 죽으면 아무것도 없다.

 

정신승리, 혹은 심리적인 자기 방어기제가 발현된 것일 수도 있겠다.

의미적으로 나는 사람새끼도 아니겠지만 적어도 생물학적으로는 '사람'으로 분류는 되니까

나 역시 사람이라 인간의 존재 이유는 죽을 때까지 절대 알지 못할 것이다.

이유를 알지 못하므로 결국 의미가 없다.

 

사는 것은 의미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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